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키아 공국 (문단 편집) == [[동로마 제국]]의 2차 지배 == >마누일 황제는 [[룸 술탄국]]에 대한 응징 원정을 가하기 전, 교황청, [[신성로마제국]]을 비롯한 여러 서유럽 국가들에게 서신을 보내 동방 로마 제국이 나서는 소위 '성전'의 위용에 대해서 자랑하였다. 독일 사신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전열은 10마일에 걸쳐 뻗쳐나갔고, 그리스인들은 물론 복속된 헝가리인, 세르비아인, 안티오키아에서까지 병력이 모였다. 이 지원군의 수는 대략 5,000여명정도 되었다. 그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은 대개 젊고 혈기넘치는 청년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안티오키아 공작의 친척인 안티오키아의 보두앵과 헝가리의 왕자, 세르비아의 족장들이 끼어 있었다. 그 숫자는 4만 5천, 외국인 병력까지 과장해서 말하면 10만에 달했다고 그리스 역사가들은 기록했다. (짐 브레드베리, 『 The Routledge companion to medieval warfare』 중에서) [[콤니노스 왕조]]의 통치 아래, 마지막 번영을 맞은 동로마 제국은 아직까지 충분히 레반트 지역의 [[장기 왕조]]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안티오키아 공국 뿐만 아니라 모든 [[십자군]] 공국들이 생존을 위해서 로마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안티오키아의 섭정이 된 [[라틴 총대주교]]는 이제 결혼할 수 있는 나이까지 자란 콩스탕스의 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베르타 황후와 사별하고 홀몸이 된 [[마누일 1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둘의 결혼으로 인해 동로마의 안티오키아 지배는 더욱 확고해졌다. 콩스탕스와 푸아티에의 레몽 사이의 아들인 보에몽 3세가 장성하기 전까지 안티오키아는 동로마의 관리들과 라틴 총대주교의 공동 섭정을 받았다. 보에몽 3세가 장성하고 나서도 안티오키아는 로마의 영향을 무시하지 못하고 봉신으로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